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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등록문화재 '남상락 자수 태극기'독립기념관에 있는 '남상락 자수 태극기'는 독립운동가 남상락(1892∼1943)이 1919년 4월 4일 독립만세 운동에서 사용하기 위해 부인과 함께 만든 태극기다. 전체를 손바느질로 만든 희귀한 태극기로 2008년 국가등록문화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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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유묵, 경매서 13억원 낙찰안중근 의사의 미공개 유묵이 27일 경매에서 13억원에 낙찰됐다. 27일 서울옥션에 따르면 이날 서울 청담동 분더샵 청담에서 진행된 경매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묵 '인심조석변산색고금동'(人心朝夕變山色古今同)이 시작가 6억원에 출품돼 13억원에 낙찰됐다. '사람의 마음은 아침저녁으로 변하지만 산색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는 의미의 이 유묵에는 안 의사의 수인(手印)과 함께 1910년 3월 뤼순(旅順) 감옥에서 썼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낙찰자는 한미반도체다. 한미반도체는 독립운동가 곽한소 선생의 후손인 고(故) 곽노권 회장이 창립한 회사다. 지난해 12월 별세한 곽노권 회장은 생전 곽한소 선생의 기록물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이 유묵은 일본에 있던 것으로, 이번 경매를 통해 국내에 돌아오게 됐다. 안 의사의 유묵은 지난해 12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용호지웅세기작인묘지태'가 19억5천만원에 낙찰되는 등 최근 경매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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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3·1절 앞두고 독립 외교활동 관련 자료 12점 첫 공개독립기념관은 28일 제105주년 삼일절을 기념해 특별자료 12점을 최초 공개한다고 밝혔다. 독립기념관은 미주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으로부터 대여된 자료 가운데,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한 자료들을 선정해 실물을 공개했다.공개되는 자료들은 3.1독립선언을 전후로 개최된 국제회의 ‘제2차 뉴욕 소약국동맹회의’(4점)과 ‘파리평화회의’(3점), ‘스위스 루체른 국제사회주의자대회’(2점) 관련 자료들과 그 외교적 성과로서 결성된 구미위원부(2점) 및 한국친우회(1점) 관련 자료를 포함해 총 12점이다 공개된 자료는 3.1 독립선언 전후로 열린 국제회의인 '제2차 뉴욕 소약국동맹회의'(4점)와 '파리평화회의'(3점), '스위스 루체른 국제사회주의자대회'(2점) 관련 자료와 그 외교적 성과로 결성된 구미위원부(2점) 및 한국친우회(1점) 관련 자료다. 또한 스위스 루체른 국제사회주의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된 ‘한국 독립 결의문’은 한국의 독립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국제적으로 처음 인정받은 자료이다. 한국의 독립과 함께 국제연맹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것을 촉구한 내용도 담겼다.독립기념관 관계자는 "이번 자료를 통해 한국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던 3·1운동을 시작으로 세계 각지로 나간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을 알리기 위해 얼마나 전력을 다했는지 알 수 있는 뜻깊은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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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4) <BR>巫世衆- 그의 명인(嗚咽)과 몸부림 통일을 위한 <br> '反 그리고 통·막·살'(2편)무세중씨는 그의 예술적 입장이 쉬르리얼리스트임을 자처하고 있다. 일찌기 쉬르리얼리즘을 무대에서 확인한 사람은 詩人 기욤 아폴리네르였다. 1917년에 공연된 장 꼭도의 '빠라드'와 아 폴리네르의 타이레시아스의 젖가슴 공연에서 超現實主義 演劇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쉬르리얼리즘 演劇이 처음으로 공연되기 1년 전인 1916년 4월, 취리히에서는 트리 스탄츠아라, 한스 아르프, 리챠드 홀젠벡크 등 세 사람이 詩人, 그리고 畵家들과 超現實主義藝 術運動의 母胎가 되는 dada演劇을 공연한 적이 있다. 이 일이 있은 후 1918년 츠아라는 그의 유명한 Dada宣言文을 발표하게 된다. 그 宣言文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무세중 연극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Dada는 사회적 계급의 타파이다. Dada는 충돌의 美學이다. Dada 는 未來의 추방이다. Dada는 본능적이며 자연발생적인 모든 점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이들은 이같이 宣言하고 反藝術,反理性,反思想의 깃발을 내걸었다. 다다이스트들(The Dadaists)은 한스 아르프가 주장한대로 '미쳐버린 時代'의 소산이다. 그래서 藝術家들은 근원적인 개혁과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같은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전략으로 '人類의 苦惱를 슬퍼하고 憤怒하는 일'에 헌신하게 된다. 다다이스트들은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그로테스크 심볼리즘 (grotesque symbolism)의 美學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앙드레 브루통, 루이 아라공, 필립 스포가 새로운 超現實主義運動을 전개해 나갔다는데 아라공이 한 말은 무세중씨와의 관련에서 중요하다. '우리들은 여러분들에게 친근한 이 매우 편리해야 하고 어리브드의 이 무며 소에 마치 혈암(頁巖) 속에 갇힌 화석마냥 사로잡혀 있다. 서구世界 속에서 여러분들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우리들은 서구의 맞춤들인 것이다... 여러분들의 공포의 대상인 東洋이 우리들의 목소리에 답할 것이다. 여러분들의 공부르타일리스트와 다다이스트들이 하고자 했던 알파한 것이고통 마살에서 실천해 보였다. 반의 빛을 내 건것이 그러했고 쏘의 타부를 타파한 것이 그러했고, 이 時代 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그러했고, 歷史의 비극과 인간의 무력함을 슬퍼하고 분노하며 크로테스크 심볼리즘에 의지하는 일이 그러했으며, 혼란과 불안의 충격적인 조성이 그러했고, 각성의식의 商가 그러했다. 이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歷史습들이 투철했기 때문이며 社會的反抗性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그의 소해 레퍼터리였던 '역사의 후회', '말하는 벙어리', '종이전쟁', '왜 삽니까' 등에서 이같은 特性은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무세중씨는 아르또의 해학을 올바르게 수용하고 있다. 그는 肉體言語의 효과적인 創造를 통해 꿈들로 얼룩진 시의 內面的 어둠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아르또의 행은 강렬성을 의 미한다. 그는 동작, 음악, 고함소리, 신음소리, 울음소리, 웃음소리, 음향효과, 그리고 스펙타클 을 통해 드라마의 강렬성을 관객으로 하여금 체험케 했다. 아르또는 그의 宣言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들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없애 고 배우와 관객의 공통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연극적 액션의 중심에 관객들을 참여케 함으로써 관객과 공연사이의 장벽을 철폐한다. 무세중씨는 이번 소회을 통해 드라마를 쓰는 사람과 드라 마를 행하는 사람의 구분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하는 측면의 實驗을 시도했다. 관객 모두가 쌀부대를 뒤집어 쓴다든가, 극장 무대에 들어서면 입구에 누워있는 배우의 몸을 건너가게 한다 든가, 관객들이 무대 위에서 배우들과 공존하면서 관객들이 무대 속으로 뛰어들게 한다든가, 공연현장을 돌아다니며 본다든가 하는 시도를 통해 관객은 연극적 액션의 중심에 어느 정도까지 접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실험해 보였다. '곡의 소리'에서 배우들이 관객들 한 사람 한 사람 면 전에 접근해서 관객들의 손을 잡으며 이들의 슬픔에 동참해 줄것을 종용한다든가, '종이 전쟁'에 서 관객이 종이 인간을 향해 종이 뭉치를 던지면서 야유를 퍼붓게 하고, 종이인간을 찢고, 종이 에 불을 당기도록 하는 일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공연 중간 중간 인터밋션 때 관객들의 合唱을 선도하는 노래도 이 일에 기여하는 책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또는 1933년 4월 6일 소르본느에서 演劇 강연을 했을 때 "나는 관객들에게 가혹한 질병 의 체험을 주고 싶다. 그래야만 그들은 공포 속에서 각성하고 깨어날 수 있다. 나는 그들을 각성 시키고 싶다. 그들은 그들이 죽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은 귀가 멀고 눈이 먼 것처럼 완벽하다. 이것이 내가 표현하려는 꿈인 것이다. 나는 탄생의 투쟁을 그리고 싶다." 무세중씨의 작품 '아편', '나는 개가 되고 싶다'는 육체와 인간의 목소리를 통해 인간 체 힘의 극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죽는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동물이 된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느정도 병들고 있는 것인가. 이같은 죽음 속에서 탄생을 위한 투쟁은 어떻게 가능한 것 인가 하는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추구하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아르또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비웃고 헐뜯고, 헐뜯고 비웃는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해방되어, 정신의 淨化을 성취할 수 있도록 만든 이 공연은 演劇의 이론을 탁월하게 무대에 실천한 공연이 되게 만들었다. 쫓는 그가 살아가는 일에 대해 어떤 해답을 지니고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죠셉 체이킨은 말한 적이 있다. 배는 그가 체험한 일에 말없이 의문을 던지면서 무대에 서고, 그가 하는 작업 과정을 통해서 그 자신을 재창조한다. 무세중씨가 이번 공연을 통해서 이룩한 빛나는 성과는 그가 쉬르리얼리즘의 演劇을 시도했다. 거나, 아르또의 殘酷演劇論을 무대에 실천했다는 데에도 있지만, 더욱더 큰 수확은 군대 현대연 극의 理論的 모태가 된 이 두 演劇潮流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우리나라의 과 의 연회 전통을 의식하고 그 표현수단에 크게 의지했다는 데 있다. '한의 소리', '곡의 소리', '통·막· 살 등은 이 점을 명확히 해준 공연이었다. 특히 南北의 장벽이 힐리는 감동적인 순간을 한 통·막 살은 그 祭儀性이나, 空間構成이나, 권인 음악과 소리에 있어서는 소도구 및 대 도구면이나, 동작과 춤에 있어서나, 그리고 액션에 있어서 序幕 부분에서 발휘된 쉬르리얼리즘 과 아르또가 우리의 巫俗과 民俗 속에서 하나로 융화되는 강렬한 무대를 창출해 내었다. 무대 한복판에 흰 광목이 팽팽하게 우뚝 쳐져 南北을 가로막고 있는 '통·막·살' 무대에서 무 세중씨는 거의 알몸이 되어 막걸리 통속에 들어가 몸을 씻고, 황토 진흙과 시래기로 온 몸을 바른 후, 광목벽을 향해 몸을 부딪히고, 머리로 박고, 이로 물어뜯고, 손톱으로 후비며 몸부림친 다. 광목벽 북쪽에 자리잡고 있던 화가 金丘林씨는 붓으로 그의 몸이 닿는 곳에 색을 칠한다. 무세중씨가 광목벽에서 몸을 때면 그의 몸이 닿았던 흰 광목벽에는 그의 苦惱가 피빛이 되어 찍혀 있다. 이 동작을 여러번 반복하고 난 다음 그가 흰 광목벽을 찢는 순간, 그는 찢어진 틈새에 몸을 걸치고 오열한다. 그리고 난 다음 그는 북으로 건너가 북쪽에 서있는 金丘林씨를 끌어안는다. 두 사람은 얼싸안고 운다. 다시 돌아서서 흰 광목벽을 완전히 제거하는 순간 朴倫初씨는 분단의 비극 때문에 희생당한 원혼을 달래는 진혼가를 판소리로 애달프게 부른다. 북소리, 징소리, 배우들의 통곡소리, 관객들의 뜨거운 눈물 속에서 統一을 위한 이 살풀이는 끝난다. 무세중씨는 한 사람의 배우로서 이 나라의 歷史 社會와 그리고 分斷의 비극에 대해서 깊은 의문을 던지며 이 무대에 발을 붙이고 섰다. 그는 무대행위 속에서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어떤 변용이 이룩되었다. 이 변용 속에서 그는 자의 재창조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의 재창조 과정은 무대 전체에 파급되었다. 배우들을 변용시키고, 관객들을 변용시킨 것이다. 그의 '反, 그리고 통·막·살은 우리 모두가 체험한 歷史 속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었고, 죽음의 恨을 달래는 鎮魂曲이었고, 새로운 탄생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로토흐스키의 명언은 이런 공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俳優는 자기의 全存在를 기증한다. 그것은 '황홀(恍惚)'의 기술이다. 이 때 俳優의 肉體와 本質의 深部에서 일종의 '透視光線'이 분출한다." 우리는 俳優의 빛이 歷史의 빛이 되는 이 무대에서 우리 자신이 무자비하게 폭로되는 공포를 느꼈다. 1982년 이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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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4 신진 연구자 지원' 공모독립기념관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2024년 신진 연구자 지원 사업'을 오는 29일까지 공모한다.올해 사업은 공모를 통해 총 11편의 연구지원 대상을 선정할 예정이다. 지원 분야는 일반학술 연구지원(박사과정 재학 이상부터 박사 취득 후 5년 이내)과 석사학위논문 연구지원(석사과정 3학기부터 수료 이내)이다.국내에서 독립운동사 특화 연구지원으로서 유일한 해당 사업은 지난 9년간 총 65편의 연구를 지원했다. 이 가운데는 독립운동사를 전공하는 외국인 유학생이나 국외 한국인 유학생들도 포함돼 있다.독립기념관 측은 "지원 대상자들이 이후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자리 잡아 나갈 수 있도록 기여하고 독립운동사 연구 기반을 강화하는데 일조하려고 한다"며 "독립운동사 연구의 진흥과 학문 후속세대 양성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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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한국의 여성 독립운동가' 시리즈 완간독립기념관은 지난 5년간 한국역사연구회·역사공장과 함께 진행한 한국의 여성 독립운동가 시리즈 발간을 마쳤다고 28일 밝혔다. 2019년 시작된 시리즈는 올해 제5권을 마지막으로 완간됐다. 그동안 다뤘던 주제는 '3·1운동에 앞장선 여성들'(2019), '항일무장투쟁과 여성 독립운동가'(2020), '국내 사회운동과 여성 독립운동가'(2021), '국외 한인사회와 여성 독립운동가'(2022), '여성 단체들의 독립운동'(2023)이다. 5권에 걸쳐 등장하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100여명이 넘으며, 개개인부터 여성 단체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 전선에서 보여준 다양한 활약상이 담겨있다. 스스로 독립운동에 나선 근대 여성들이었다. 무명의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노동의 주체이자 사회의 주체, 민족의 주체가 되어 독립운동 현장에서 활약하였다. 독립기념관은 이런 여성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대중서와 대중강연을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려 노력했다. 특히 제1권 '3·1운동에 앞장선 여성들'에 수록된 권애라 편은 충남도 점자도서관과 협업해 점자책으로도 발간돼, 전국의 점자도서관과 특수학교 도서관, 공공도서관 장애인 자료실 등에 배포됐다. 개성의 첫 3·1 만세 시위를 이끈 여성 독립운동가를 조명한 권애라 편에는 그와 함께 활약한 심영식(1897∼1983) 열사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심영식 열사는 시각장애가 있음에도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로, 장애를 딛고 독립운동의 주체가 된 희생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책을 발간했다. 독립기념관 관계자는 "여성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조명하는 일은 우리가 잊고 있던 독립운동가를 복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주체로서 여성의 역사를 기억해 '공공의 역사'로서 여성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과 사회적 관심을 고양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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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립독립기념관 개관 기념 전시도록 발간양산시립독립기념관(관장 신용철)은 개관 기념 상설전시 도록을 발간했다고 밝혔다.이번 도록은 지난 8월 개관 이후 일제강점기 양산의 독립운동사를 다룬 상설전, 양산의 독립유공자를 주제로 한 개관기념 특별기획전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도록은 ▲항일의병활동 ▲양산의 독립만세운동 ▲윤현진과 윤현진 일가의 독립운동 ▲양산농민조합의 시위운동과 통도사의 항일독립운동 등 4가지 주제로 구분했으며, 기획전시는 ▲양산 출신 독립유공자들의 활약상을 국내·외로 나누어 소개했다.이번 도록은 초중고등학교, 도서관 등에서 학생들의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관내 유관기관과 전국의 관련 박물관 및 기념관에 배포해 양산의 독립운동사를 알리는 역할을 할 예정이다. 기념관 내 역사자료실 의춘당에서도 이번 도록을 볼 수 있고 곧 홈페이지를 통해 열람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신용철 관장은 "이번 도록의 발간으로 양산의 독립운동사를 정리할 수 있게 됐다”며 "많은 분들이 이 책을 통해 순국선열의 숭고한 나라사랑을 느끼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도록에 대한 문의사항은 양산시립박물관 독립기념관팀(055-392-4832)으로 연락하면 상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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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화성지역 독립운동기념관 교육활성화 학술대회화성시문화재단(대표이사 김신아)이 운영하는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은 한국박물관교육학회(회장 이관호)와 함께 ‘화성지역 독립운동기념관 활성화’를 주제로 2023년 학술심포지엄을 10월 20일(금) 오후 1시 동탄복합문화센터 소회의실에서 개최했다. 경기남부보훈지청의 국비지원 사업인 현충시설 활성화 사업에 선정돼 열린 이번 학술대회는 일제강점기 화성3.1운동과 2019년 개통된 화성3.1운동만세길(이하 만세길)의 문화자원을 발굴하고, 교육적 활용 방안을 모색한다는 차원에서 마련됐다. 이날 행사에는 학계연구자들과 박물관, 기념관 종사자들, 대학원생 등이 다수 참여했다.화성 독립운동가 후손인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의 기조 강연 ‘화성지역 독립운동의 성격과 특징’ 발표를 시작으로 제1주제 ‘MZ 포스트메모리 세대의 문화적 기억과 독립운동·트라우마적 경험의 유산화 방향(강선주 경인교육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제2주제 ‘교육으로 독립운동 가치 나누기(박한나 독립기념관 학예연구사)’, 제3주제 ‘만세길의 교육적 활용방안(윤태석 전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장)’ 그리고 사례발표 ‘스토리텔링 기반 박물관 전시해설 이용자 경험에 관한 사례연구(하미라 백범김구기념관 연구원)’가 이어졌다.이후 종합토론에서는 박희명(백범김구기념관 학예팀장), 한동민(수원화성박물관장), 김형준(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참여해 MZ 세대들이 생각하는 기억과 추모가 아는 지식을 넘어 삶에 대한 통찰로 가기 위해 기념관의 역할은 무엇인지, 새로 건립된 기념관의 학예 사업 방향과 2025년 받게 될 평가 인증, 만세길의 현황과 문제를 되짚어 보고 지방자치단체가 활성화를 위해 가야 할 방향 등 깊이 있고 광범위한 토론이 진행됐다.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김태동 독립운동문화팀장은 "지금까지 일제강점기 화성의 독립운동은 제암리·고주리학살 사건에 집중되고 연구됐다면, 이제는 3.1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펼쳐진 화성지역의 3.1운동 활성화를 위한 교육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며 "학술대회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화성독립운동 연구 및 만세길 활용사업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기준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한편 화성시문화재단은 2019년 7월,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과 화성3.1운동만세길을 화성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 중이다.이번 학술심포지엄과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화성시문화재단 독립운동문화팀으로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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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안창호 가족들은 알고 있다”1980년대 들어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간행물들이 영인출판으로 공개되었다. ‘아세아문화사’를 선두로 많은 출판사가 잡지와 신문 등을 복각(復刻)하였다. 이를 통해 국학분야는 근대에 대한 연구의 진척을 볼 수 있었다. 애국가 분야 같은 특수 분야도 마찬가지다. 특히 ‘독립신문’의 복각 출판으로 구한말의 애국가 운동 전모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5년만의 준비로 1987년 독립기념관의 개관을 계기로 해외 산출 자료의 대량 수집, 공개로 독립운동사 분야는 물론 인접 부야도 큰 혜택을 보는 계기였다. 애국가 분야로서는 임시정부와 안창호와 안익태 자료의 전모를 통해 획기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특히 미주 ‘신한민보’ 완질(完帙) 입수를 통해 안익태의 애국가 작곡 시기와 악보와 음반 발행 시기를 알게 되었고, 안창호의 유품을 통해 가족들의 인식 여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애국가 분야에는 두 가지 현상이 있게 되었다. 하나는 안창호에 대한 자료가 집대성 되어 그의 애국시가(愛國詩歌) 전모가 드러난 것이고, 또 하나나는 안창호 연구가 활성화 되어 애국가 작사설이 다시 대두하게 된 점이다. 이 결과로 안창호의 애국시가 중에 잡지와 신문 소재 "애국가” 곡명의 두 작품을 확인하여 안창호가 작사한 ‘애국가’가 따로 있었음을 밝혀냈다. 바로 안창호는 다른 애국가 작사 사실 때문에 현 애국가의 작사자로 오해를 받게 되었고,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를 드러내지 않고 있음도 확인하였다. 이번 회에서는 이 사례와 유사한 안창호 가족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을 검토하기로 한다.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1884~1969) 여사가 1962년 정부 초청으로 건국공로훈장 수훈차 귀국을 했다. 이 때 흥사단 기관지 ‘기러기’는 이혜련 여사와의 인터뷰를 수록했다. 이를 통해 가족관계는 물론, 흥사단 창립과 3·1운동, 서재필과의 교류, 이갑(李甲)선생의 엄지손가락 마비 사실 같은 것도 기술했다. 그런데 이 기사에는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또한 미국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한 큰아들 필립이 1960~70년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여러 잡지와 인터뷰를 하면서도 ‘거국가’만 언급을 했을 뿐이고, 애국가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가족들이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런데 큰딸 수산의 경우는 조금은 다르다. 2003년 펴낸 책 ‘버드나무 그늘 아래- 도산 안창호의 딸 안수산 이야기-’에는 21개 에피소드를 담고 의외로 참고문헌을 첨부했다. 그리고 ‘도산 선생’ 외 3개 항목에 아버지와 가족 이야기를 기술했다. 여기에서 ‘거국가’ 4절 가사 제시했고 애국가도 두 번이나 언급을 했다. 첫 대목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의거 직후 부친이 평양 대성학교에서 체포되어 용산 감옥에 수감된 후의 상황에서다. 밤이면 감옥 근체에 대성학교 학생들이 와서 부친이 듣도록 ‘올드랭 사인 애국가’를 불렀다고 하였다. 이 기술은 이미 다른 증언에서 알려진 에피소드로 단순한 애국가를 부른 정황을 전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 상황은 이미 개교 당시부터 교장인 윤치호가 작사한 현 애국가를 불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음은 ‘감옥 속의 아버지’라는 항목에서 1926년 2월 장리욱이 자택으로 찾아온 날을 회상한 열한 살적 기억이다. "월슨 꼭대기에서 아버지는 조용히 있지 않았다. 그와 장리욱은 건너편 산골짜기 아래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우뚝 서서는 목청껏 애국가를 불렀다. 장난치던 아이들도 나무줄기를 향해 돌을 던지던 놀이를 멈추고선 친숙한 올드랭 사인의 멜로디에 조선말 가사를 붙인 노래를 듣기 위해 조용히 서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아버지가 울고 있어, 다 울고 있어··· 아버지가 왜 우는 거지? 아이들은 서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도산의 인격과 생애’의 저자 장리욱과 안창호의 친밀 관계를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위 두 대목에서 애국가 작사자 여부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족들도 작사자가 부친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이런 진술은 나름 진정성이 있는 상황임으로 의미가 크다. 그러므로 애국가 작사자 문제가 격렬하게 전개된 2000년대의 기록은 학습된 정보로 보게 된다. 애국가 작사자 문제로 방문한 이들로부터 주입된 정보로 사료적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정황을 보여 주는 자료가 있다. 그것은 1915년 아들 필선에게 보낸 서신의 일절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차남 필선에게 보낸 엽서이다. 가족의 안부를 묻고 차남 필선을 격려하는 내용이다. "필션아 네가 이져음에도 마취(march)를 잘하며 동해물과 백두산도 잘 부르느냐 나는 잘 잇노라” 어린 아들에게 행진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씩씩하게 자라라고 격려했다. 이런 정도인데도 애국가를 자신이 작사했음을 숨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후 가족 누구도 6, 70년대 귀국하여 애국가 작사자가 부친이라고 말 한 바가 없다. 이는 자신이 작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작사자에 대해 말 하지 않은 결과이다. 결론은 이렇다. "안창호는 가족들에게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작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안창호는 애국가(국가)의 기능을 알고 있기에 아들에게까지 부를 것을 독려하였다. 안창호는 지극한 애국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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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예술가 무세중의 ‘황토아리랑’조동일 교수 "초기 문화운동 판에서 무세중은 '신명'이 너무 넘쳐 학교에 남지 않고 현장으로 나갔다.” 신명으로 몸과 마음으로 공연을 하는 무세중 선생. 1989년 8월 15일 광복절날에 독립기념관을 ‘황토아리랑’으로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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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념식동학농민혁명 기록물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념식’이 29일 전북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서 열렸다.송재영 명창의 '여는 공연'으로 시작된 기념식에서는 문화재청이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등재 인증서를, 전북도와 정읍시에 등재 인증패를 각각 전달했다.이어진 사발통문 퍼포먼스에서 김지수 서예가는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축하하는 의미를 담아 '동학농민혁명기록물 세계기록유산으로 꽃피다'라는 문구를 썼다.기록물 등재를 위해 함께 노력했던 이들을 대표해 정읍시와 전북도, 문화재청, 기념재단, 등재추진위원회, 전국유족회 등이 사발통문 모양에 핸드프린팅을 하며 기록물 등재에 의미를 다시 새겼다.이번 기념식을 계기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인류 역사가 함께 보존·전승해야 하는 유산으로 인정되면서 앞으로 동학농민혁명정신 세계화와 선양사업에 더욱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특히 내년은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 되는 해로 정읍시와 기념재단은 동학농민혁명기록물 홍보를 위해 아카이브 구축, 특별전시, 해제집 발간, 국제학술대회, 기록물의 외국어 번역 등 다양한 사업을 함께 추진하며 동학농민혁명의 세계사적 위상을 드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이학수 시장은 "이제 정읍시와 기념재단은 한마음 한뜻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세계사적 위상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도록 함께 기념사업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면서 "다양한 기념사업을 발굴해 동학농민혁명정신의 세계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란 1894년에 발발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기록물로 동학농민군이 직접 생산한 기록물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민간인이 남긴 문집과 일기, 동학농민혁명 견문 기록물, 조선정부가 생산한 보고서와 공문서 등 전체 185건(1만3132면)이다.이 기록물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을 비롯해 고려대 도서관, 국가기록원, 국립고궁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국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천도교 중앙총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 11곳의 기관에서 소장·관리하고 있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185건의 동학농민혁명기록물 가운데 ‘사발통문’이 포함돼 있어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인 고부농민봉기가 재조명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발통문은 고부농민봉기가 우발적 사건이 아닌 치밀하게 준비되고 계획된 사건을 증명해 주는 문서이지만, 고부농민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전사(前史)로 표현되는 등 그 가치가 폄하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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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100년, "백년 동안의 증언"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를 맞아 '백년 동안의 증언'(책읽는고양이)이 출간됐다. 2023년 9월 1일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다.'백년 동안의 증언'은 1923년 간토대지진 이후 일본의 혐오사회와 국가폭력에 맞서온 한·일 작가와 일반 시민들의 기록이다. 이 책은 와세다대학 객원교수를 지낸 김응교 저자가 지난 20년 동안 간토대지진 관련 장소를 답사하고 여러 증인을 만나며 문헌을 연구 정리한 책으로, 반일(反日)을 넘어 집단폭력에 맞서는 두 나라 시민의 연대를 제안한다.일본 정부는 지난 백년 동안 조선인 학살로 이어진 간토대지진을 끊임없이 삭제하려 했지만, '백년 동안의 증언'은 의도적인 ‘삭제의 죄악’에 맞서 ‘기억의 복원’을 말한다. 이것만이 같은 비극을 막는 길이며, 한일 양국의 새로운 백년을 위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 ‘사건’에서는 지진이 어떻게 인재로 전개되는지를 정리하여 보여준다. 2장 ‘15엔 50전’은 쓰보이 시게지의 장시 '15엔 50전'을 국내 초역으로 수록했다. 3장 ‘증언’에서는 이기영, 김동환, 구로사와 아키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드라마 ‘파친코’ 등 여러 작품을 통해 간토대진재를 다룬 작가와 감독의 증언을 전한다. 4장 ‘진실’에서는 진실을 드러내고 피해자의 치유와 가해자의 책임을 촉구하는 일본의 개인과 모임을 소개한다. 5장 ‘치유’에서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피해자와 삭제와 왜곡으로 시달리는 가해자 모두의 치유를 위한 방안을 살펴본다.관동대지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속에 결국 중요한 건 '치유'다. 일본 정부는 지난 백년 동안 조선인 학살로 이어진 간토대지진을 끊임없이 삭제하려 했지만 저자는 "의도적인 ‘삭제의 죄악’에 맞서 ‘기억의 복원’"을 말한다. 그는 이것만이 같은 비극을 막는 길이며, 한일 양국의 새로운 백년을 위한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김 교수가 2005년 학술지를 통해 번역 발표했던 이 시는 100년 전 역사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 불이 꺼지지 않는 중에 / 벌써 유언비어가 시중에 문란하게 떠다녔다 / 요코하마(橫浜) 방면에서 센징(鮮人·조선인에 대한 차별어)이 떼를 지어 밀려오고 있다!' 사실 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은 소문이 퍼져갔고, 많은 조선인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은 1923년 12월 5일 자 신문에서 지진 이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로 인한 피해자가 6천661명이라고 보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반일은 위험하다 백년의 갈등, 그 해법은 무엇인가2008년 호주 노동당 총리 케빈 러드는 원주민 애버리지니(Aborigine)들을 모시고 ‘도둑맞은 세대’에 사과했다. 호주는 매년 5월 26일을 ‘국립 사과의 날’로 지키며 혐오 문제를 극복하려 애쓴다. 1970년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바르샤바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했다. 백년 이상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지배했던 흑인 차별은 1994년 넬슨 만델라에 의해 멈추었다. 이들은 진실을 밝히고 보복 대신 사면하고 화해의 공동체를 이루어나갔다. '십오엔 오십전(十五円 五十錢)이라고 해봐!' 15와 50이 앞뒤로 있는 간단한 문구. 누군가는 말장난 아니냐고 하겠지만, 100년 전 일본에서는 생사를 가를 정도로 무서운 말이었다. 자신 있게 '쥬우고엔 고쥬센'라고 발음하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츄우코엔 코츄센'이라고 발음하거나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무자비한 창칼이 날아들었다. 저자는 발음 하나를 듣고 사람의 목숨을 따진다는 것은 광기라고 폭로한다. 일본 시인 쓰보이 시게지(壺井繁治·1898∼1975)는 '그저 그것 때문에' 1923년 9월 일본 간토(關東) 지방에서 조선인들이 무참히 살해됐다고 증언한다. 일본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일본에도 아시아에 저지른 백년의 과거를 괴로워하는 일본 시민, 작가, 학생 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이 어느 정도 사죄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은 큰 범죄를 한국에 범했다. 게다가 아직 한국인에게 일본은 충분히 사죄하지 않고 있다.” 라고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과거 일본의 침략 사실을 인정하고 상대국이 됐다고 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 라고 했다. 소수이긴 해도 일본 내에도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는 지식인들이 있기에 단순한 반일은 위험하다.우리는 집단적 광기라는 것이 망상(妄想)에 불과하다는 뚜렷한 기억(記憶)을 새겨야 한다. 따라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반대하고 군인 위안부 문제나 왜곡된 역사 교과서를 시정하려는 일본 시민 단체와 연대하고, 한국과 일본의 양심 세력·연구자·작가들이 ‘우리’가 될 때, 장시 '15엔 50전'의 숙제는 그 만남의 자리에서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저자는 일본 정부가 변할 수 있을까 묻는다. 그 가능성이 0%라고 해도 일본 정치인들의 변화를 기대하고 모든 매체를 통해 바른 말을 하는 정치인을 격려하고, 잘못된 판단을 세뇌시키려는 정치인에 대한 비판을 멈추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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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광주고려인마을, ‘항일무장투쟁의 별’ 김경천 장군 세미나광주고려인마을은 대일항쟁기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여 수많은 전과를 올렸던 김경천 장군의 항일애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특별전 및 기념세미나’ 를 개최한다. 고려인마을은 지난 15일 광복절 제78주년을 맞아 마을축제를 통한 국가의 소중함을 교육하기 위한 방안으로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투 재현 행사’ 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어 오는 30일 오후 2시에는 항일무장투쟁의 별 김경천 장군의 고귀한 애국 애족정신을 계승하고 후손에게는 국가의 소중함을 교육할 김경천 장군 특별전과 세미나를 개최한다. 김순흥 전 광주대 교수의 사회로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의 ‘신흥무관학교와 남만산천’의 발제에 이어 김 장군의 증손녀 김올가씨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는 증언과 김병학 고려인문화관장의 ‘경천아일록과 김경천의 생애’ 가 발표된다. 한편 고려인마을은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 세미나 참석자들을 위한 기념품도 준비했다. 기념품은 김경천 장군이 전투 중 기록한 일기를 책으로 편찬한 ‘경천아일록 영인본’(월곡고려인문화관, 민족문제연구소광주지부 공동편찬)이다.‘경천아일록’ 은 김 장군이 전쟁 중 쓴 기록물과 회고록을 일기 형식으로 남긴 저서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버금가는 가치로 평가받고 있다.김 장군은 일제 강점기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여 수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백마탄 장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때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해 전설적인 김 장군으로 연해주 일대에 널리 알려지자 김일성이 그의 명성을 이용함에 따라 ‘김일성 가짜설’의 증거로 인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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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광주고려인마을, 김경천 장군 특별전 및 기념세미나 개최광주고려인마을은 일제 강점기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여 수많은 전과를 올렸던 ‘김경천 장군 특별전 및 기념세미나’ 를 개최한다고 3일 밝혔다.고려인마을에 따르면, 현재 고려인문화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특별전에는 김경천 장군이 전투 중에 기록한 ‘경천아일록’ 필사본과 관련 기록물, 가족사진, 시, 서적 등 자료 수 십점이 전시되고 있다.오는 30일 오후 2시에는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의 사회로 ‘김경천 장군의 항일 애국정신 계승방안’ 에 관한 세미나가 고려인마을커뮤니티센터에서 열린다. 이날 세미나에는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이 참석해 발제를 하며 김올가 김경천 장군 증손녀와 김병학 고려인문화관장의 증언과 관련 자료에 관한 토론 등이 진행된다.고려인마을은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 세미나 참석자들을 위한 기념품도 준비했다. 기념품은 김경천 장군이 전투 중 기록한 일기를 책으로 편찬한 ‘경천아일록 영인본’(월곡고려인문화관, 민족문제연구소광주지부 공동편찬, 606페이지)이다.‘경천아일록’ 은 김 장군이 전쟁 중 쓴 기록물과 회고록을 일기 형식으로 남긴 저서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버금가는 가치로 평가받고 있다.김 장군은 일제 강점기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여 수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백마탄 장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이때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해 전설적인 김 장군으로 연해주 일대에 널리 알려지자 김일성이 그의 명성을 이용함에 따라 ‘김일성 가짜설’의 증거로 인용되고 있다.1936년 김 장군은 소련 정부의 한인 인텔리 피검정책과 관련 체포되어 3년 금고형을 선고 받은 후 복역하다 1939년에 잠시 석방되었다. 이것은 김경천이 민족주의자로 소련 공산주의에 참여하지 않은 대가로 추정된다.이후 간첩죄로 다시 체포되어 8년형을 언도받고 러시아 북부철도수용소에서 철도건설노동자로 강제 노역을 하다 1942년 1월 14일 비타민 결핍으로 인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으나 안타깝게도 어디에 안장됐는지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이에 고려인마을은 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김 장군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자 "김경천 장군 소공원‘ 건립 계획을 수립,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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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한영서원과 윤치호, 그리고 애국가한영서원(韓英書院 Anglo-Korean School)은 윤치호와 애국가의 역사적 거점이다.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그렇다. 하나는 한영서원 학생용 찬미가집에 ‘Patriotic Hymn 뎨14(애국적 찬미가 제14장)’을 수록하여 애국가로 확산시켰고, 둘은 1910년대 초 교사들에 의해 ‘애국창가집’을 발간하는 등 노래운동을 전개하며 윤치호 작사 애국가를 보급시켰다. 셋은 졸업생들이 "애국가는 윤치호 교장 작사”라고 배웠음을 증언하여 작사자를 확정하는데 기여하였다는 사실이다. 한영서원과 윤치호의 관계에 대해서는 1912년 9월의 경성지방법원 ‘新民會·105人事件 判決文’에서 확인이 된다. "피고 윤치호는 고(故) 남작 윤웅렬(尹雄烈)의 장남으로 어려서 도쿄(東京)에 유학하고, 그 후 상해에 가서 영어를 배운 후 미국에 도항(渡航)하여 그곳에서 유학한 지 5년 후 귀국하여 의정부참의(議政府參議), 학부협판(學部協辦)이 되고 그 다음 외부협판(外部協辦)으로 전임하여 제1차 한일협약(1904) 성립의 결과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개성 한영서원(韓英書院),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원장 및 교장을 맡고 있으면서, 위의 협약 체결에 상당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1094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 개성 한영서원 원장(교장)을 맡았다고 하였다. 1912년 신민회사건 판결문에서 밝힌 것이다. 다음은 1933년 중반 대중잡지 ‘三千里’에서 ‘평양 대성학교장(大成學校長) 역대거두(歷代巨頭) 윤치호・안창호’에서 대성학교를 소개하며 언급한 기록이다. "평양 대성학교 초대 윤치호 씨는 구한국 정부시에 駐米(미국)공사를 역임하였고 개성의 한영서원 원장으로도 있었으며 더욱 재야 시에 서재필 이상재 씨 등과 더불어 독립협회, 대한렵회 등 정당을 창설하여 크게 활약하던 분이다. 교장으로 재직한지는 양 4년 간이다.” 한영서원은 윤치호의 이력에 중요한 지점이다. 특히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의 후원을 얻어 개교하였다는 기독교적 배경에서 애국계몽운동이란 그의 철학을 실현한 곳이면서 ‘애국가’의 탄생지이며 확산의 거점이기 때문이다. 윤치호가 1906년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10월 3일 14명의 학생으로 개교하였다.교사는 초가지붕의 뜸집이었고 ‘한영서원’이라 쓰인 커다란 현판을 단 것이 전부였다.그러다 1908년에는 225명으로 확대되어 동년 9월에 대지 120평에 3층의 석조 건물로 신축하였다. 학칙에 의하면 인문교육 및 실업교육 중심으로 소학과 4년, 영어전수과 2년, 고등과 3년, 반공과(半工科) 3년 과정이 있었다. 소학과에서는 수신, 국어, 한문, 역사, 일어, 산술, 이과, 도화, 창가, 체조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고, 고등과에서는 도덕, 국어, 한문, 역사, 일어, 수학, 영어, 음악, 체조, 지리, 도화, 작문, 과학을 가르쳤다. 반공과는 고등과에다 실업과목을 더해서 가르쳤고, 일주 27시간의 수업을 하였다. 학생은 15세 이상의 남자로 신체건강하고 품행이 단정하며 보통 국한문에 통달한 자로 하였다. 이 같이 실업교육이 강조된 것은 윤치호의 직업관으로 기본 원리 습득과 사회 적응을 준비하는 교육적 목적 추구 외에도 학생들의 수업료 부담을 줄이고 자립의 여건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런 정황에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초판과 재판의 발행 상황을 추정할 수가 있다. 즉, 초판 ‘찬미가’는 소수의 입학생을 위해 13편을 수록하여 등사(프린트)판으로 소량 발행하고, 이후 학생 수의 증가로 교재 간행 등을 위해 윤치호 등이 인수한 출판사 광학서포(廣學書鋪)에서 재판을 발행하였다. 여기에서는 1907년 새로 작사한 ‘찬미가 14장’(애국가) 외 1편을 더해 연활자의 정식 출판으로 출간하였다. 광학서포는 김상만책사(金相萬冊肆)가 이름을 바꾼 것으로, 윤치호ㆍ이상설ㆍ남정철ㆍ조경구ㆍ김학진ㆍ김진수ㆍ임병항 등의 발기로 설립되었고, 같은 해 4월 29일에 열린 임시총회에서 회장에 윤치호, 사장에 김종한(金宗漢)을 선출하여 운영하였다. 1907년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 신채호가 번역한 ‘이태리건국삼걸전’, 장지연의 ‘애국부인전’, 윤치호 역술 ‘찬미가’ 등을 발행했다. 일제강점 이후 압수, 검열, 발매금지 등으로 출판방향을 바꾸었으나 1910년대 말까지 약 100여 종을 출판하고 문을 닫았다. 이렇게 ‘찬미가’는 윤치호에 의해 설립 된 학교의 교재로, 그의 주도로 운영된 출판사 출판물로 간행되었다. 이의 결과로 이 책에 수록된 ‘애국적 찬미가 제14장’은 찬송가의 기능을 넘어 대표적인 ‘애국가’로서 불러지게 되고, 같은 미션계 학교로 파급되었다. 이 시기는 일제가 강점 하여 지배를 하기 위해 시국의 노래에 주목을 하는 상황이었다. 조선총독부 테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이 1911년 7월 1일 각도 장관회의 연설에서 이런 내용을 강조한 바가 있다. "독립을 고취하고 일본제국을 반대하는 불량창가이자 위험한 노래는 허용하지 않으니 취체상 주의가 필요가 있다. 일본은 실력으로서 이를 진압할 것이고, 이 때문에 오직 조선인만이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이런 총독의 단언은 이 시기 애국적이고 민족적인 노래들이 많이 불렸으며, 동시에 가장 엄한 불경죄로 다스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2년 3월부터 발효한 ‘조선형사령’이나 ‘조선민사령’을 기존의 보안법이나 출판법과 함께 적용하여 이중으로 탄압을 한 것이 그렇다. 한편 이 시기 윤치호는 소위 ‘신민회 105인’ 사건으로 투옥 되었다. 그러나 이 공백을 대신하여 교사들이 맡아 애국가 등으로 민족교육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를 일제는 ‘한영서원 창가집 사건’으로 포착하여 탄압하기에 이르렀다. 일제가 출판법과 보안법은 물론 조선형사령까지 적용하여 탄압한 대표적인 사건이다 교사 신영순과 백남혁, 서기 오진세, 음악과 교사 정사인, 그리고 권사 이경중이 애국창가집을 발행하고 보급하였다. 이 창가책이 일경에 압수된 사건이다. 사학자 강덕상(姜德相)의 ‘現代史資料’를 인용하여 서술한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 ‘한영서원 애국창가집 발매반포투쟁’의 일부는 이렇다. "1914년 경기도 개성 사립 한영서원 교사 신영순(申永淳)·이상춘(李常春) 등이 배일사상 양성에 일조하고자 국권회복을 고무하는 창가 편찬을 협의하였다. 이들은 수편의 애국창가를 작가(作歌)하고 간도에서 창가를 수집해 갖고 있던 이경중 목사에게 이를 제공받은 다음 윤치호가 지은 ‘애국가’를 포함해서 1914년 8월 제1권 40부를 인쇄하여 한영서원 및 호스돈여학교 생도에게 반포하였다. 이어 1915년 9월 제2권 90책을 반포하였다. 1916년 신영순·이상춘 등 6명은 이 사건으로 보안법위반 및 불경죄로 피체되었다. 이후 음악교사 정사인(鄭士仁), 학감 이만규(李萬珪), 음악대 생도 10명, 사립 호수돈여학교 교사 등 22명이 추가로 피체되었다. 음악교사와 생도들은 창가를 연주한 행위를, 윤자순(尹滋亨)과 이치선(李致善)은 1912년 10월 이와 유사한 창가집을 편찬한 사실을, 그 외는 창가집의 배포와 관련된 활동을 문제 삼았다.” 이 사건으로 분명히 드러난 것은 윤치호가 교장인 한영서원이 애국 창가 보급에 앞장섰으며 이 때 불려진 애국가는 윤치호 작사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 때의 ‘애국가’가 윤치호 작이라는 것은 방증 자료가 있다. 1914년 간도 일본총영사관 산하 외사경찰이 외무성 외무대신(加藤高朋)에게 보고한<最新唱歌集 發賣禁止ニ關スル件>에 의한다. 여기에는 ‘尹致昊作 愛國歌等 不隱唱歌’라고 하였다. "韓英書院ノ不隱文書發覺 大5.11.13. 尹致昊作 愛國歌 等 不隱唱歌集 印刷 一部 40錢” 또한 이 사건의 주모자로 수형을 겪은 교사 신영순의 관련 증언에도 1913년 문제의 창가책에 ‘윤치호 작 애국가’가 분명히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교사와 학생들의 증언에서 윤치호 작사임이 확인 되는데, 이후의 기록들에서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독립기념관 자료에는 ‘김동성(金東成, 1890∼1969)이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콘웨이, ARK; 1911)이 있다. 이는 김동성이 1911년 10월 15일자로 미주에 있던 안창호에게 보낸 것이다. 여기에는 "소생은, 송도 한영서원 생도로 2 년간을 윤치호씨 아래 있다가···”라고 하여 윤치호를 잘 알고 있었음을 표한 자료이다. 김동성은 1924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학 이론서 ‘新聞學’을 출간했다. 언론인으로서 동아일보 기자로 출발하여 조선일보 등에서 활동하고 합동통신을 설립하였다. 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의 해외특파원, 국제기자대회 최초의 참석자, 최초의 군정청 여권소지자, 맥아더(MacArthur,D.)를 회견한 최초의 한국기자 등, ‘최초’ 기록을 보유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으로 초대 공보처장을 맡았다. 그런데 이 김동성이 1955년 5월 2일자 서울신문과 1967년 11월 6일자 경향신문에 애국가가 윤치호의 작임을 밝혔다. "나는 이미 50년 전부터 ‘愛國歌’ 작사자가 尹致昊 선생이란 것을 명백히 알고 있다. 내가 한영서원에 다닐 때 학생들은 매일 아침 윤선생이 만든 ‘愛國歌’를 불렀던 것이다.” 한영서원 학생의 직접 체험을 증언한 것이다. 이는 당시 교사 채필근이나 신영순이 증언한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한영서원은 윤치호가 설립한 남감리교 게통의 미션스쿨로 학생들을 위한 ‘애국가’를 지어 교재로 발행했다. 이는 이웃 기독교계 학교로 전파시켜 많은 애국가류 중에서 ‘애국적 찬미가 제14장’을 대표 ‘애국가’로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을 교사들의 실천과 학생들의 증언으로 후세에 남겨주었다. 이제 윤치호 애국가 작사와 그 확산 등을 맥락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06년 한영서원 개교, 초판 ‘찬미가’ 프린트본 발행 ↓ 1907년 ‘애국적 찬미가 14장’ 작사 ↓ 1908년 재판 역술 ‘찬미가’에 ‘애국적 찬미가 제14장’으로 수록 ↓ 1910년 미주 국민회의 ‘국민가’ 채택, ‘국민가’로 사용 ↓ 1914년 한영서원 애국창가집 발행으로 ‘애국가’ 확산시킴 ↓ 1919년 3. 1운동 기간 대표적인 애국가로 부상 ↓ 1919년 임시정부, 애국가를 국가로 대용 ↓ 1940년 국민회 안익태 신곡보 사용 허가로 임시정부 국가로 준용(準用) ↓ 1945년 10월, 묵서 가사지를 통해 작사 사실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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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부, 광복절 맞아 국외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31명 초청국가보훈부는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외거주 독립유공자 후손을 초청하는 행사를 개최한다고 11일 밝혔다. 보훈부에 따르면, 11일부터 17일까지 6박7일 일정으로 미국·중국·러시아·쿠바 등 7개국 31명의 독립유공자 후손을 초청해 '민족이 얼, 나의 뿌리' 행사를 진행한다. 한국을 방문하는 후손들은 미국, 중국, 러시아, 쿠바 등 7개국 31명이다. 후손 중에는 1922년 연해주 스챤에서 고려혁명군의 동부사령관으로 대백군 및 대일항전을 전개한 김경천 지사(1998년, 대통령장)의 손녀 필란스카야 엘리나(62, 러시아) 씨와 증손녀 샤라피예바 에벨리나(34, 러시아) 씨가 한국을 찾는다. 1907년 원주로 진군한 일본군 토벌대를 격파하는 등 의병으로 강원, 충북, 경기지방에서 왜병을 수차례 격파한 민긍호 지사(1962년, 대통령장)의 증손녀 민 나탈리아(48, 카자흐스탄) 씨, 민 콘스탄틴(42, 카자흐스탄) 씨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지원한 최재형 지사(1962년, 독립장)의 증손녀 구타라 이리나(러시아, 58세) 씨도 방한한다.방문 기간 중 후손들은 12일 국립서울현충원 참배를 시작으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방문하고 전통문화 거리를 체험한다. 13일에는 독립기념관을 방문하고 대전현충원 참배 후 인기드라마 미스터션샤인 촬영지인 션샤인랜드를 찾을 예정이다.15일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주요 외빈으로 참석하는 이들은 일정의 마지막 날인 16일 제3땅굴과 도라전망대 등 비무장지대(DMZ)를 견학하고 보훈부에서 주관하는 환송만찬을 끝으로 17일 출국한다. 특히, 이번 초청 행사에 참가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윌크스 김 더스틴 라일리(27, 미국) 씨와 현대미술 작가 정선희(57, 미국) 씨는 방한 일정 중 선조들을 위한 바이올린 연주, 작품 기증의 의사를 밝혀 더욱 의미 있는 행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에서 국내의 참상을 알리고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차의석 지사(2021 애족장)의 외증손자이자 미국 샬롯 심포니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는 윌크스 김 더스틴 라일리 씨는 12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선열들께 바치는 바이올린 헌정곡을 방문객을 대상으로 연주할 예정이다.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독립유공자분들의 불굴의 용기와 신념으로 독립을 쟁취한 역사는 대한민국의 번영과 발전을 이루는 든든한 토대가 됐다"며, "이 자랑스러운 애국의 역사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대한민국을 응원하고 계신 독립유공자의 후손분들께도 긍지와 자부심으로 전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외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행사’는 광복 50주년인 1995년 시작되어 매년 실시됐다. 코로나19로 2년간 중단되다 작년부터 재개돼 2022년까지 20개국 926명이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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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전국 흥타령 국악경연대회 수상자 명단제 5회 전국 흥타령 국악 경연대회 최우수상 수상자 명단 수상부문 수 상 자 훈 격 일반부 김 도 현 (충남예총 연합회 회장) 학생부 박 세 음 (충남예총 연합회 회장) 단체부 박지연 외 10명 (충남예총 연합회 회장) 대상 수상자 명단 수상부문 수 상 자 훈 격 일반부 박 지 현 (충청남도 도지사) 학생부 박 세 인 (충청남도 도지사) 단체부 김 화 자 (충청남도 도지사) 우수상 수상자 명단 수상부문 수 상 자 훈 격 일반부 김 나 연 (한국국악협회 충청남도지회장) 학생부 백 서 연 (한국국악협회 충청남도지회장) 단체부 전 옥 희 (한국국악협회 충청남도지회장) 장려상 수상자 명단 수상부문 수 상 자 훈 격 일반부 곽 정 임 (한국국악협회 천안시지부장상) 박 현 빈 학생부 김 아 영 (한국국악협회 천안시지부장상) 최 유 담 단체부 박현수 외 9명 (한국국악협회 천안시지부장상) 강유분 외 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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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91주년 기념식 개최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 91주년 기념식이 오는 29일 개최된다. 국가보훈처는 오는 29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강당에서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 91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고 28일 밝혔다. 이날 나치만 서울지방보훈청장, 각계 인사와 기념사업회 회원, 독립유공자 유족 등 2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번 기념식은 국민의례와 약전봉독, 기념 식사 및 기념사, 유시봉독, 축하공연, 유족대표 인사, 윤봉길의사 노래, 만세삼창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1908년 충남 예산에서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윤봉길 의사는 1931년 중국 상하이에 도착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이후 1932년 4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전승 경축식이 훙커우공원에서 열리자 윤 의사는 오전 11시 40분경 수통형 폭탄을 단상 위로 투척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단장이 사망했고 노무라 중장과 시게미쓰 공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 의사는 의거 직후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돼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 그해 5월 상하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25세 나이로 총탄을 맞고 순국했다. 윤 의사의 유해는 김구 선생의 요청에 따라 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해 1946년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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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한국 독립운동사 20선' 7월말까지 전시전북 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이 독립기념관과 함께 '사진으로 보는 한국 독립운동사 20선 전시회'를 다음달 1일 개막한다. 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이하 기념관)은 오는 7월 30일까지 독립기념관 순회전시 '사진으로 보는 한국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 20선'展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오는 7월 30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우리 민족이 일제에 항거한 대표적인 사건을 20점의 사진을 중심으로 소개함으로써 독립운동사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전시 주제는 독립기념관(관장 한시준)에서 진행한 국민투표에 의해 선정된 것으로 ‘국민과 함께 만드는 전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자료는 ▲의병 활동 ▲오산학교 ▲안중근 의사 의거 ▲2.8 독립선언 ▲학생비밀단체 ▲윤봉길 의사 의거 ▲조선어학회 등 일제강점기 주요 항쟁과 관련 인물 사진으로 구성되며 상세한 설명도 덧붙였다. 또 기념관 내에는 태극기 만들기, 태극기 전달하기, 만세운동 전파하기, 독립군 기념촬영 등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 체험교육 공간을 조성해 운영된다. 기념관 관계자는 "역사적인 장면과 중요 자료가 담긴 사진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을 알리기 위해 마련됐다"면서 "앞으로도 나라를 지키고자 노력한 선조의 행적을 보여주는 전시를 기획해 기념관을 호국보훈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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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빈 선생 등 독립유공자 32명에 대한민국 호적 부여정부가 제104주년 3·1절을 맞아 직계 후손이 없는 무호적 독립유공자 32명의 가족관계 등록을 창설하고 대한민국의 호적을 부여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1일 신관빈 선생, 김강 선생(1995년 독립장), 강진해 선생(1995년 독립장), 김명세 선생(1991년 애국장), 김경희 선생(1995년 애국장) 등 무호적 독립유공자 32명에 대해 가족관계 등록을 창설, 등록기준지는 ‘독립기념관로 1’로 부여했다고 밝혔다. 보훈처는 지난해 7월 윤동주 시인, 송몽규 지사 등 156명에 대해 가족관계 등록을 창설한데 이어 연말까지 이용담(1963년 독립장), 김천성(1968년 독립장) 등 11명의 독립유공자의 가족관계 등록을 추가로 창설했다. 이에 따라 이번 3·1절까지 직계 후손이 없는 무호적 독립유공자 199명의 가족관계 등록 창설을 완료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번에 가족관계 등록이 창설된 무호적 독립유공자 32명은 일제강점기 조선민사령 제정 이전 국외로 이주하는 등의 이유로 대한민국의 공적서류상 적을 한 번도 갖지 못했다. 가족관계 등록 창설 독립유공자 중 신관빈 선생은 1919년 3월 1일 개성 시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다음날 체포돼 1919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유관순 열사와 서대문형무소 여옥사(8호) 동료로, 신관빈 선생은 올해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또한 1920년 ‘간도 15만 원 사건’에 연루돼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순국한 김강 선생, 한국독립군 별동대장으로 중국 동녕현 전투에서 순국한 강진해 선생, 중국 길림성 연길현에서 독립운동단체에 가입 활동 중 순국한 김명세 선생,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로서 비밀결사(송죽회)를 조직해 항일투쟁을 전개한 김경희 선생 등의 가족관계 등록도 이번에 창설됐다. 보훈처는 순국 100년 만에 조국으로 유해를 봉환할 예정인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 유진 초이 역의 실제 인물인 황기환 지사(1995년 애국장)를 비롯해 무호적으로 남아있는 독립유공자에 대한 가족관계 등록 창설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그동안 직계 후손이 없어 호적이 없던 32명의 독립유공자들이 대한민국 공식 서류상에 등재되는 것으로, 이는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사셨던 분들을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의 상징적 조치”라며 "앞으로도 무호적 독립유공자분들을 ‘완전한 대한국인’이 되도록 해 국가와 국민적 예우를 받으실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문의는 국가보훈처 보훈예우국 공훈관리과(044-202-5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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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사 자필 선서문 寶物 된다이봉창 의사가 1932년 히로히토(裕仁) 일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기 직전 작성한 선서문이 보물로 지정될 예정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봉창 의사 선서문’은 이봉창(1900~1932) 의사가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벌이기 직전인 1931년 12월 13일 작성한 것이다. 일본에 대한 항쟁을 다짐한 국한문 혼용 선서문으로, 김구가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인 ‘인애국단’에 제출됐던 것이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祖國)의 獨立(독립)과 自由(자유)를 回復(회복)하기 爲(위)하야 韓人愛國團(한인애국단)의 一員(일원)이 되야 敵國(적국)의 首魁(수괴)를 屠戮(도륙)하기로 盟誓(맹서)하나이다’라고 적혀 있다. 항일 독립투쟁의 역사를 증명하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한 것이다. 앞으로 이런 의미를 지닌 항일독립문서가 지정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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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잠들어 있는 독립운동사 자료 찾기’ 캠페인 추진독립기념관은 국민과 함께 독립운동 자료 발굴, 복원, 공유, 확산을 위해 ’집안에 잠들어 있는 독립운동사 자료 찾기 캠페인-독보기‘를 추진한다.30일 기념관에 따르면 자료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던 독립운동가들의 고귀한 정신이 담겨있는 소중한 유산이자, 영구히 보존·계승해 나가야 하는 소중한 보물이다.이번 캠페인 제목 '독보기'에는 우리 민족이 지켜야 할 ‘독립운동사 보물 찾기’의 줄임말이다. 이는 아직 집안에서 발견하지 못한 독립운동사 자료를 돋보기를 이용하는 것처럼 꼼꼼하게 찾아보자는 취지가 담겨있다. 특히 독립기념관은 이번 캠페인을 통해 발굴된 자료 중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자료들은 SK텔레콤과 함께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과 복원 서비스를 제공 ‘2023년 보상구입' 추진을 검토할 예정이다.독립기념관 관계자는 "이번 캠페인을 통해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은 독립운동사 자료의 발굴을 통해 독립운동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며, 자료기증자에 대한 예우도 점차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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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호적 윤동주 홍범도 등 독립유공자 156명 집, 독립기념관 '겨레의집' 전입신고‘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 1번지’ 겨레의 집.이 곳은 국내 주소가 없어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던 항일투쟁 독립운동 영웅 156명이 ‘2022년 8월 10일’부터 이들의 집이 된 곳이다.천안 독립기념관 안에 '집'이란 명칭이 붙은 곳은 '겨레의 집'이 유일하다. 집 주소가 없어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던 156명의 집으로 최적의 장소다.정부는 지난 2009년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에 따라 직계 후손이 있는 경우 후손의 신청을 받아 지원했다.하지만 직계 후손이 없는 무호적 독립유공자는 해당 하지 않았다. 이에 보훈처는 지난달 독립유공자 공적 및 신상 관련 정보와 허가신청서를 서울가정법원에 직권으로 신청해 156명의 독립 영웅에 대한 ‘가족관계등록증’이 발급됐다. 이날 ‘무호적 독립유공자 가족관계등록 창설 완료’ 행사에는 박민식 국가보훈처장과 윤동주 시인 겸 독립운동가, 송몽규 애국지사의 후손(조카) 윤인석씨, 송시연 씨 등이 참석했다.156명의 독립 영웅들은 국가보훈처가 신청하고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장 직인이 찍힌 ‘가족관계증명서’가 발급돼 전시됐다. 이 중 고 윤동주 시인의 ‘가족관계증명서’에는 ‘등록기준지’로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 1’로 명시됐으며, 출생연월일, 성별, 가족 사항 등이 2022년 7월 27일 날짜로 인쇄됐다.특히, 이날 행사에서 윤동주 시인의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이하 생략)’로 시작되는 ‘또 다른 고향’이 낭송이 이어지면서 행사 참석자들은 시구의 의미를 곱씹으며 행사장은 숙연해졌다.또한 참석자 전원이 ‘역사어린이합창단’의 ‘독립군가’ 선창에 따라 힘차게 노래를 따라 부르며 제77주년 광복절과 독립항쟁의 의미를 회고했다. 이후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서시’로 알려진 윤동주 시인, 인요한 국가보훈처 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은 송명규 지사, 한시준 독립기념관장은 오동진 지사, 한승경 현봉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장인환 의사, 황원섭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부이사장과 어린이합창단은 홍범도 장군과 가족의 가족관계증명서를 사진 아래 붙였다. 박처장은 "법조인 출신이지만, 행정관청에서 문서를 발급한 차원으로 그치는 게 아닌 이런 사업이 앞으로도 활발하게 추진돼야 한다"면서 "윤동주 지사를 조선족 중국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상황이 앞으로 생기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민족의 빛나는 역사, 조국독립을 위해 온 몸을 바치셨던 156명의 독립영웅들께서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토록 그리워하셨던 새로운 고향,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과 겨레의 얼이 살아 숨 쉬는 독립기념관으로 모시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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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홍범도 장군 등 독립유공자 156명 호적 생긴다국가보훈처는 11일 윤동주 지사, 장인환 의사, 홍범도 장군, 송몽규 지사 등 "직계후손이 없는 무호적 독립유공자 156명의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등록 기준지(독립기념관로 1)는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 기념사업회, 서대문형무소 등 유관기관의 의견을 바탕으로 결정했다고 보훈처는 전했다. 직계후손이 없는 무호적 독립유공자의 가족관계등록부를 정부가 만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2009년 2월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신채호·이상설 선생 등 직계후손이 있는 경우에 한해 후손 신청을 받아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을 지원한 게 전부였다. 옛 호적법의 본적에 해당하는 등록기준지로는 ‘독립기념관로 1’을 부여할 예정이다. 독립기념관로 1은 독립기념관의 주소다.가족관계등록부 창설 대상 독립유공자로는 윤 시인, 홍 장군 외에 광복군총영을 조직한 오동진 지사, 일제 침략을 적극 옹호한 미국인 더럼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 의사 등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17명이 포함됐다. 윤 시인의 고종사촌 형인 송몽규 지사와 홍 장군의 가족(부인, 1·2남)도 포함됐다. 무호적 독립유공자 156명은 일제강점기 조선민사령 제정(1912년) 이전 국외로 이주하거나 독립운동을 하다 광복 이전에 숨져 대한민국 공적서류상 호적을 한 번도 갖지 못했다. 조선인 국적은 1948년 국적법 제정 이후 대한민국 국민으로 이어진다는 판례에 따라 이들이 우리 국민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를 뒷받침할 공적서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었다. 중국 포털 바이두 등은 윤 시인이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를 들어 국적을 중국, 민족을 조선족이라고 표기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번 조치는 이런 역사적 논란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보훈처는 광복절 전까지 이들의 대한민국 가족관계등록부가 창설될 수 있도록 서울가정법원과 협의할 계획이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사셨던 분들을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 보훈의 상징적 조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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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강 이강년 의병대장 학술대회 자료집 발간운강이강년의병대장기념사업회(회장 이영범)가 ‘운강학술대회발표논문자료집’을 발간했다. 지난해 10월 15일과 16일 문경문화원 다목적실, 문경새재라마다호텔에서 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문경시-문경시의회-경북북부보훈지청-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성균관문경청년유도회가 후원해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엮은 것이다. 책에는 김희곤 안동대학교 명예교수의 ‘문경의 독립운동과 의병’을 시작으로 신진희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사의 ‘이강년 의진을 통해본 동학농민군과 의병의 상관관계’, 이에 대한 신영우 충북대학교 명예교수의 토론문, 강민구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의 ‘의병장 이강년 격문류(檄文類)의 가치와 의미’, 이에 대한 우지영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의 토론문, 김항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의 ‘이강년의진 참여자의 판결양상과 내용’, 이에 대한 최보영 용인대학교 교수의 토론문, 김성진 의암류인석기념관 학예연구사의 ‘독립운동사적지(기념관) 기억과 기념 어떻게 할 것인가-의암류인석유적지(기념관) 운영사례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엄원식 문경시청 문화예술과장의 토론문이 1부 자료로 실렸다. 이어서 이성우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장의 ‘이강년의진에서 활약한 인물의 1910년대 이후 항일투쟁’, 이에 대한 강윤정 안동대학교 교수의 토론문, 심철기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의 ‘운강 이강년의병장 자료현황과 과제’, 이에 대한 원재영 연세대 강사의 토론문, 이광현 성주고등학교 교사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항일 의병운동 서술 현황과 과제-주요 의병장에 대한 서술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조철호 경상북도교육청 중등교육과 장학사의 토론문, 김연갑 아리랑학교장과 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의 ‘문경 의병과 아리랑’, 이에 대한 권갑하 시인의 토론문이 실렸다. 부록으로는 ‘격고각도열읍(檄告各道列邑)’, ‘이승재(운강의 큰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통고문’, ‘취정록’, ‘송상도의 기려수필에 기록된 운강 이강년’, ‘유방집’을 실었다. 운강이강년기념관 자료총서 2집으로 펴낸 이 책은 가로 19.8cm, 세로 27.2cm의 크기에 320쪽을 두꺼운 표지로 둘러싸 엮었다. 이영범 회장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밝히는 지표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섰던 운강 선생이 남기신 의로운 삶의 정신”이라며, "이 민족, 이 나라의 올바른 길을 열어주는 선생의 정신을 문경에서부터 열어 전국으로 나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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